사랑은 찰나의 순간 운명처럼 다가온다. 초시계로 잴 수도 없는, 번개가 치는 순간 비친 그 혹은 그녀의 얼굴에서, 과속이 틀림없는, 굉음을 내지르며 달려가는 스포츠카의 헤드라이트 불빛 잠깐의 장면으로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야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운명 같은 첫걸음이 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그 사랑과 운명의 사이. 어느 날 우연히 본 홈런 1개가, 삼진을 잡은 투수의 손짓 하나가 평생 그 팀의 팬을 만든다. 소년의 꿈은 전단지에서 시작된다. SK 최정은 “어릴 때 학교에서 ‘이거 해 볼 사람’ 얘기에 다 손을 들었다. 보이스카우트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다. 그때 야구부가 생겼다. 야구부도 하겠다고 손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야구 선수가 됐다.
미네소타에서 뛰는 박병호도 비슷했다. 정부 정책이 ‘꿈나무 육성하자’였던 문민정부 첫해, 어머니가 들고 온 리틀야구 부원 모집 전단지에서 메이저리그의 꿈이 시작됐다. 박병호는 “솔직히 야구의 야자도 몰랐다”고 했지만 정작 방망이를 쥔 손은 남달랐다. 더 만화 같은 얘기도 있다. 김진욱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은 강원도로 전학을 갔다가 우연히 야구를 만났다. 전학 갈 학교를 미리 둘러보기 위해 찾았던 일요일 오후의 운동장. 만화에서처럼 발 앞으로 굴러온 야구공. 그 공을 집어 던진 주인공. 그리고 이어지는 “자네, 야구 한번 해볼 생각 없나”. 그렇게 야구가 다가왔다.
던지기는 익숙한 클리셰다. SK 이대수는 군산 앞바다 신시도에서 나고 자랐다. 또래 꼬마들과 바닷가에서 돌팔매질을 하는 게 놀이였다. 동네 꼬마 누구보다도 돌을 멀리 던질 수 있었다. 소문이 났고, 육지에서 열린 ‘공 멀리 던지기 대회’에 나갔다. 그 어깨가 야구의 길로 이끌었다. 바닷가에서 돌을 던지던 꼬마는 곧 육지로 나와 야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진짜 만화 때문인 경우도 있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만화’ 때문에 포수가 됐다. 1979년 나온 허영만 화백의 <태양을 향해 달려라> 주인공 강토의 포지션이 포수였다. 김 감독은 “만화 속 포수 장비가 너무 멋져서 포수를 하게 됐다”고 했다. 어쩌면 만화의 한 장면이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으로 이끌었다.
사랑과 운명으로 이끄는 수많은 찰나의 순간과 장면들이 있지만, 운명을 향하도록 이끄는 이들이 존재한다. LG 양상문 감독의 야구는 캐치볼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글러브를 갖고 학교에 오라고 했고, 선생님과 꼬마 양상문이 캐치볼을 시작했다. 양 감독은 “선생님도 왼손, 나도 왼손이었다. 그때 그 캐치볼이 야구를 하게 만들었다”며 “이상규 선생님이었는데, 제대로 인사 드린 적도 벌써 오래”라고 했다.
SK 김광현은 어릴 적 아버지 손잡고 잠실구장을 자주 다녔다. 잔디가 좋았고, 공이 좋았고,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았다. 김광현은 “아버지 덕분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야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5월은 가정의달이고 15일은 스승의날이었다. 진짜 스승이란 많은 지식을 알려준 은인이 아니라, 인생의 나침반을 바꿔놓는 운명 같은 존재다. 손을 잡고 야구장을 간 아버지도, 캐치볼을 함께한 스승도 야구를 운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6일, 1군 유일의 97년생 NC 박준영은 성년의날을 맞았다. 박준영을 야구로 이끈 것 역시 어쩌면 운명. “축구, 농구, 야구 다 좋아했는데,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고 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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