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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기억(Memory)-2011 준PO4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1. 10. 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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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2회초, SK 선두타자 4번 박정권이 2루수 내야안타로 1루에 살아나갔다. 5번 안치용이 우익수 뜬공, 6번 최동수가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그때부터 박정권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2사 1루보다 2사 2루가 득점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박정권의 근육이 ‘기억’(Memory)을 떠올렸다. 단기전에서 득점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박정권의 시즌 도루는 9개뿐이었지만 박정권은의 7번 박진만 타석, 볼카운트 1-2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2루에서 세이프됐다. 박정권은 당시 상황에 대해 “모르겠다. 정신없이 뛰었다”며 웃었다. 1루에 있던 김태균 코치는 “2사 뒤 뛸 수 있으면 뛰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박정권의 도루는, 가뜩이나 지친 몸으로 투구를 하고 있던 KIA 에이스 윤석민을 묘하게 흔들었다. 이미 1차전의 구위는 아니었다. 노련한 완급조절로 승부를 해야 했다. 타자와의 싸움이 1차전과 달리 꽤나 신경쓰이는 윤석민에게 박정권의 도루는 ‘생각할 거리’를 하나 더 안겨줬다. 윤석민-차일목 배터리는 볼카운트 2-2에서 연거푸 볼을 던지며 박진만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다행히 정상호를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도루’라는 부담감을 안은채 남은 이닝을 풀어가야 했다.

 

SK 최정은 앞선 경기의 부진을 극복하고 지난해 한국시리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이만수 감독대행은 첫 관문을 통과했다. 광주/이석우 기자


결과적으로 4차전은 SK로 하여금 지난 4년간의 한국시리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머릿 속이 아니라 근육이,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어떻게 단기전을 치러야 하는지를 되살려냈다. 박정권의 도루는 신호탄이었다.

KIA가 2회말 무사 1·3루, 1사 만루 기회를 점수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무산시킨 뒤 맞은 3회초. 야구의 상투적 명언 하나가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위기 뒤 찬스’. 1사뒤 정근우가 중전안타로 살아나갔다. 볼카운트 0-2 되자 주저없이 스타트를 끊었다. 또다시 윤석민-차일목 배터리가 흔들렸다. 박재상은 볼넷을 골랐다. 1사 1·2루. SK 김바위 전력분석원은 “그때부터 윤석민의 투구 밸런스가 갑자기 무너졌다. 도루 때문으로 보인다. 상체가 채 넘어오기 전에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직전 이닝 KIA의 득점 기회 무산은 윤석민을 더 쉽게 지치게 했다. 4차전 자원등판으로 피워 올린 불꽃이 마음 속에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상대는 내야까지 흔들고 있었다. 윤석민이 흔들렸다.

3번 타자는 최정이었다. 최정은 지난 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당시 삼성의 에이스 역할을 하던 차우찬으로부터 홈런 2개를 빼앗았다. 그 홈런 2방이 결국 시리즈를 스윕으로 만들었다. 삼성이 꺼내들 수 있는 최후의 카드를 무너뜨렸다. 최정의 몸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최정은 볼카운트 0-2에서 윤석민의 공을 놓치지 않았다.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좌익수 김상현은 타구가 뜬 뒤 잠시 잡을 수 있는 듯 ‘페이크 동작’을 하는 듯 했으나 이내 아예 뒤로 돌아 공을 쫓았다. 재빨리 공을 잡아 던졌지만 1루주자 박재상마저 홈을 밟았다. 2점은, 이날 경기의 흐름상 너무 컸다. 박정권도 좌중간 2루타로 최정을 불러들였다. KIA 조범현 감독은 윤석민을 마운드에서 내렸다. 사실상 경기가 끝났다.

승부는 기울었지만 SK 선수들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모드를 근육에 되살렸다. 상대의 약점이 보이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공격에서, 주루에서, 팀 배팅에서, 수비에서 치밀한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5회말 이용규의 타구는 중견수 앞을 향했으나 짧았다. 중견수 김강민은 이용규의 타구음이 들리자마자 공을 확인한 뒤 고개를 숙인채 전력질주를 했다. 예상했던 지점에 멈춰섰고, 고개를 들어 천천히 타구를 잡아냈다. 부상으로 빠졌던 김강민에게 ‘수비 본능’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근우는 5-0으로 앞선 6회 2사 뒤 중전안타로 출루해 또다시 도루를 성공시켰다. 이미 승부가 기울었지만 상대의 약점이 보인다면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 정근우는 또다시 홈을 밟았다. 6점째였다. 그리고 정근우는 8회 타석에서 몸에 맞는 공을 맞았다. 정근우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발발거리고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그래도 SK 선수들은 다음 타석을 걱정하지 않았다. 틈이 보이면 파고들었다. 김성근 감독의 해고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잊혀졌던, SK 가을야구의 ‘기억’이 살아났다.

올시즌 최고 투수였던 KIA 윤석민은 결국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선취점이 있었더라면 윤석민의 투구는 조금 더 오래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광주/이석우기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 하나가 사라졌다. 2년 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을 맞은 기억. 그때 마스크를 쓰고 있던 정상호의 기억. 1차전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바깥쪽 승부를 주로 가져가며 ‘큰 것’을 의식했던 정상호는 2차전부터 과감한 몸쪽 승부, 주자가 쌓여도 흔들리지 않는 승부를 가져가며 박경완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KIA 타선이 시리즈 내내 침묵했던 것은 컨디션 저하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상호의 효과적인 볼배합, 그리고 SK 투수들의 제구력 때문이었다. 롯데가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4차전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SK의 타선이 아니라, KIA를 꽁꽁 묶었던 포수 정상호다.

PS. 반대로 KIA는 그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4차전을 앞두고 나지완은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지완은 “TV에서 그 장면이 나오면 일부러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린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억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지완은 1차전 4번타자로 기용됐다. 나지완은 “수비까지 나서야 했다. 머릿 속이 복잡했다”고 말했다. 나지완은 결국 3차전을 앞두고 찾아온 장염 때문에 선발 출전하지 못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나지완은 준플레이오프에서 14타수 3안타(0.214), 1타점에 그쳤다.

가장 심각했던 기억은 안치홍이었다. 안치홍은 2009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결정적 홈런을 때렸다. 고졸 신인이 첫 해에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을 때린 것은 안치홍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기억’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안치홍은 11타수 2안타(0.182)에 머물렀다. 3차전 번트 병살타, 4차전 무사 1·3루 삼진은 KIA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안치홍을 두고 KIA 관계자는 “뭔가 알아가는 시점에서 그때 활약이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2회초 무사 2루, 나지완의 우전안타 때 김상현이 3루에서 멈춘 것을 두고 김용달 IPSN 해설위원은 “다음 타자가 타격감이 극도로 좋지 않은 안치홍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무조건 홈에 들어왔어야 했다. 시간상 충분했다”고 말했다. 백인호 3루코치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윤석민의 구위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1점보다는 가능한 한 주자를 쌓아 대량득점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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