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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준과 영어의 힘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3. 3. 1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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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한국 대표팀은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호주전을 치렀다. 대표팀 선발투수 송승준은 첫 타자 베레스퍼드를 1루 땅볼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데닝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다. 1회초 3점을 먼저 내고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전날 네덜란드에 당한 0-5 완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경기 흐름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3번째 타자 휴즈는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볼카운트 1-1에서 결국 사달이 났다. 메이저리그 심판을 맡고 있는 그레그 깁슨 주심은 난데없이 송승준의 보크를 선언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송승준이 마운드를 내려가 심판을 향했다. 대표팀 류중일 감독과 양상문 투수코치도 그라운드로 뛰어나왔다.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루주자 데닝은 2루로 진루했다. 1사 2루가 됐다. 그 흐름을 바꾼 건 송승준의 주무기 포크볼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무기, ‘영어’였다. 


봉중근이 2009 WBC 일본전에서 선두타자 스즈키 이치로를 만나 초구 대신 선택했던, “카메라 플래시가 방해된다”고 심판에게 얘기했던 바로 그 ‘영어’였다. 



송승준은 깁슨 주심에게 “왜 보크냐”고 물었고, 깁슨 주심은 “글러브가 흔들렸다”고 답했다. 송승준이 다시 “글러브는 전혀 안 흔들렸다”고 하자 깁슨 주심은 “아니, 다리가 흔들렸다”고 말을 바꿨다. 송승준이 재차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자, 깁슨 주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하냐.”


송승준은 “내가 마이너리그에서 9년을 뛰었다”고 답했다. 대표팀 주변에 따르면 송승준은 그때 ‘욱’했다고 한다. 


대표팀 3번타자였던 김현수는 “승준 형이 그때 열 좀 받았다”고 했다. 송승준은 휴즈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4이닝을 2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승리투수가 됐다. 


깁슨 주심의 한마디는 해프닝을 넘어선다. ‘영어’가 갖는 권위가 아니라 ‘메이저리그’가 갖는 권위의식이다. 김현수는 “솔직히 말해서, 심판들이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더라”고 했다. 스트라이크 존 판정이, 보크 판정이 이상했던 이유는, 김현수의 느낌대로라면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이번 WBC 대표팀은 처음으로 단 한 명의 메이저리거 없이 구성됐다. 김현수는 “네덜란드랑 대만이 왜 잘할 수 있었냐 하면, 걔네 팀에는 앤드루 존스와 왕젠밍이 있었다”며 “특히 네덜란드는 완전히 ‘앤드루 효과’다. 앤드루가 타석에 들어서면 심판이랑 막 농담하고 그랬다”고 했다. 앤드루 존스는 메이저리그 10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자고, 왕젠밍은 아메리칸리그 다승왕 경력을 가졌다. 


대표팀의 전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의 문제라는 얘기다. 김현수는 “우리도 (추)신수 형이 있었더라면 심판들이 좀…”이라더니 “아니다. 우리가 야구를 잘못해서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WBC가 또 하나의 숙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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