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국제대회지만, 야구의 국제대회 또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야구에서 선발투수의 격(格)이 있을까.
2007년 12월2일, 대만 타이중의 인터컨티넨탈 구장에서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할 팀을 가리는 야구 아시아 예선이 펼쳐졌다. 한국은 일본전을 앞두고 있었다. 당초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제출된 라인업에는 한국 대표팀 선발투수가 류제국(당시 탬파베이)으로 표시돼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열렸을 때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전병호(당시 삼성)였다. 경기 시작 10분 전까지 선발 라인업을 수정할 수 있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대표팀은 기존 라인업에서 선발투수 외에도 6명이나 바꾼 라인업을 제출했다.
일본 대표팀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발끈했다.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주심에게 항의했다. ‘관례’에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우완 류제국에서 좌완 전병호로 바뀐 것도 그렇거니와 일본 선발 좌완 나루세에 맞춰 타선도 우타자로 대거 교체된 데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호시노 감독은 ‘위장 오더’라고 했다. 상대의 선발투수를 살핀 뒤 일종의 ‘격’을 맞춰 라인업을 구성한 셈이 됐다.
그렇다고 전병호가 격이 떨어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일본전 선발투수로 내정돼 있었다. 구석구석을 찌르는 제구와 노련한 타이밍은 일본 타자들과 충분한 싸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경기는 아쉽게 3-4로 졌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 때 일본 기자는 “2차 예선과 올림픽에서도 ‘위장 오더’를 사용할 것인가”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2001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만에서 열린 야구 월드컵 미국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미국 감독이 대표팀의 김정택 감독에게 물었다. “우리 팀 선발은 좌완이다. 한국 선발은 좌완이냐 우완이냐.” 김 감독은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미국 감독은 경기 전 라인업을 교환할 때 뒷주머니 양쪽에 각각 우완과 좌완에 대비한 2가지 타순표를 준비하더니 한국 선발이 좌완 이혜천임을 확인하고는 슬쩍 좌완 대비 타순표를 제출했다. 그때 미국 감독이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린 테리 프랑코나(현 클리블랜드)다.
보스턴 레드 삭스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 (AP연합)
상대 선발을 확인한 뒤 타순표를 제출하는 것은 일종의 꼼수지만, 경기 전 선발투수가 좌완인지 우완인지 밝히는 것도 야구 국제대회에선 일종의 관례다. 관례와 규정, 실리 사이에서 길을 헤매는 일이 야구뿐만은 아니다. 상대 선발과 라인업을 미리 확인하려 하고 격을 따지다가 중요한 회담이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위장 오더 논란이 벌어지고 이중 라인업을 구성하는 일이 생겨도, 야구는 한다.
격이 맞지 않는다고 경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주심이 ‘플레이볼’을 외치면, 그곳에서 또 하나의 세상이, 역사가 시작된다. 한 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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