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14일. 오후 10시53분.
‘야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까. 박병호(넥센)는 경기가 끝났는데도 더그아웃에 앉아 멍하니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서 박병호가 보는 곳을 함께 보고 싶었다. 2시간 전, 0-3으로 뒤진 9회말 2사. 박병호가 때린 공은 한참을 날아 백스크린을 맞혔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극적인, 벼락같은 동점 홈런이었다. 그러고도 경기는 2시간을 더 했다. 4시간53분의 승부가 끝난 것이 10시53분이었다.
동료들이 말없이 짐을 챙기고 있는 동안에도 박병호는 자리에 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첫번째 가을 야구, 승리를 얻지 못한 채 끝난 공허함.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스리런의 기억. 박병호에게 물었다. “만약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언제가 좋을까.”
박병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거 없다. 다들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애써 웃음짓는 입술꼬리가 조금 떨렸다. 박병호는 다시 그라운드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때, 시즌 마지막 날 한화전(10월5일) 때 내가…, 쳤어야 했는데…”라고. 박병호는 그제서야 다리에 묶여 있던 보호대를 풀고 글러브를 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한 웃음을 되찾았다. 내년에는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각오가 담긴 웃음이었다.
# 10월20일. 오후 5시10분.
1-2로 뒤진 8회초 1사 2루. 그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자리를 지켰다. 11년 만의 가을야구, 마지막 타석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LG 이병규(9번)는 다시 한번 3루 응원석을 들썩이게 하는 2루타를 때렸다. 한 번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대주자 양영동으로 교체된 후였다.
늘 그랬듯 더그아웃에서 씩씩한 응원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깊은,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후배 이병규(7번)의 타구가 잠실구장 왼쪽 외야로 힘차게 날았을 때, 그도 힘차게 날아 더그아웃 앞으로 나왔다. 두산 외야의 시프트가 아니었다면 동점 적시타가 됐을 타구였다. 탄식이, 아쉬움이 그의 표정에 짙게 남았다. 잠시 후 경기는 끝났고, 팬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더그아웃 앞으로 나온 그의 표정은 마흔의 나이만큼이나 복잡했다. 곧 다가올 ‘다음 기회’를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11월1일. 오후 9시52분.
승부는 기울었다. 3-7. 9회 2사. 혼자 힘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만 두산 김현수는 대기타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손시헌의 타구가 중견수 뜬공이 되자 삼성 선수들이 일제히 마운드로 뛰어나갔다. 김현수에게 ‘마지막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삼성 선수들이 마운드에 모여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팀 도미니카공화국의 세리머니를 따라하고 있을 때에도 김현수는 방망이를 지팡이 삼아 선 채 대기타석을 떠날 줄 몰랐다. 그라운드에 시상대가 설치될 때까지도 김현수는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상대의 우승 세리머니를 지켜보는 일이 벌써 3번째. 노래 ‘그 남자’의 가사처럼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보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을 계속해야 할까 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김민재 코치가 굳어 있는 그를 발견하고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자 그제서야 그는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방망이를 바닥에 끌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래. 한 경기가, 한 시리즈가, 한 시즌이 끝났을 뿐이다. 야구가 끝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 등을 돌린 세 남자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저 승리가, 우승이 잠시 유예됐을 뿐이다. 야구는 곧 다시 시작된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FA 인플레? 구단들의 자업자득 (0) | 2013.11.18 |
---|---|
베테랑 감독의 힘을 보여줘! (0) | 2013.11.11 |
경험과 과감 (0) | 2013.10.21 |
야구장의 은퇴 (0) | 2013.09.30 |
오·박 대전, 이것이 야구다 (0) | 2013.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