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처럼 일과가 정확했던 철학자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준칙인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적었다. 상대적 윤리가 아닌 절대적 윤리의 지향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보편적 입법이 가능한 수준의 윤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무론이다. 그런데 야구는 지금까지, 칸트와 거리가 꽤 멀었다.
야구는 팀 승리를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종 ‘변칙’을 썼다. 벤치와 포수가 전달하는 사인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사인을 훔쳐보지 않는다”는 칸트식 윤리가 종종(혹은 자주) 무시되기 때문이다. ‘홈 어드밴티지’라는 미명 아래 홈그라운드를 자신에게 유리한 모양으로 바꾸는 것은 ‘변칙’ 축에도 끼지 못하는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야구는 변화구로 ‘속이고’, 2루와 3루를 ‘훔치는’ 일이 정당화되는 스포츠다. 원래 태생적으로 칸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편 선수를 속이는 일은 ‘재치 넘치는 플레이’다. 도저히 아웃시키기 어려운 뜬공을 마치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외야수가 글러브를 위로 들어 속이는 일은 기본이다.
1991년 미네소타와 애틀랜타의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0-0이던 8회초 애틀랜타는 무사 1루에서 테리 펜들턴의 우중간 2루타가 나왔다. 1루수 로니 스미스가 홈까지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때 미네소타의 신인 2루수 척 노블락은 마치 2루 땅볼인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공을 잡아 2루에 던지는 척했다. 스미스는 화들짝 놀라 2루를 지났다가 돌아갔고, 결국 홈에 들어가지 못한 채 3루에서 화를 내며 헬멧을 집어던졌다. 무사 2·3루 위기에서 미네소타 선발 잭 모리스는 삼진과 병살타로 위기를 넘겼다. 미네소타는 결국 연장 10회 끝에 1-0으로 이기고 우승을 따냈다. 노블락의 ‘페이크 수비’는 비겁한 한 수가 아니라 빛나는 한 수가 됐다. 때로는 심판을 속이는 것조차 ‘팀 승리를 위한 영웅적 행위’로 평가받는다. 내야와 외야 사이에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타구에 외야수가 몸을 날렸을 때 모든 외야수들은 ‘직접 잡은 것처럼 행동하라’고 배운다. 심지어 원바운드로 잡았다 하더라도 글러브를 번쩍 쳐들어야 한다. 그것이 ‘팀을 위한 길’이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투수의 공이 타자를 스친 뒤 포수 뒤로 빠졌다면 타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정석이다. 두산 장민석은 넥센 장기영이었던 2012년 5월12일 SK전 4회초 2-2 동점, 2사 1·3루에서 폭투가 나왔지만 그 공이 발에 맞았다고 고백함으로써 3루 주자의 득점을 없던 일로 만들었다. 넥센은 결국 점수를 따지 못했고 경기는 2-3으로 졌다. 장기영은 ‘양심선언’이라는 수식어가 달렸지만 ‘도덕적 선수’보다는 ‘역적’에 가까웠다.
이제 야구의 윤리도 바뀐다. 메이저리그는 2014시즌부터 비디오 판독을 도입하기로 했다. 외야수의 아슬아슬한 트랩 캐치 여부, 몸에 맞는 공 등이 모두 비디오 판독 대상이다.
마크 J 해밀턴 미국 애슐랜드대학 철학과 교수는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에서 ‘상대팀이 아닌 심판을 속이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라고 정의했다. 야구라는 맥락 속에서 상대를 속이는 일은 전략이 될 수 있지만 규칙을 위반하고 심판을 속이는 행위는 반칙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반칙 여부가 이제 전광판에 고스란히 ‘공식적’으로 나온다. 이제 장기영은 ‘역적’이 아니라 ‘도덕적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원바운드로 잡았다면 속일 필요없이 재빨리 송구동작에 들어가면 된다.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인터넷·모바일뿐 아니라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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