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넥센 배터리코치는 “야구는 자기희생을 공식기록으로 남겨 내가 팀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문서로 보여주는 종목”이라고 했다. 야구는 ‘희생’을 통해 득점을 내서 이기는 종목이다. 메이저리그 명포수 요기 베라는 “팀 동료들을 내 앞에 세우는 희생을 통해 팀 동료들 곁에 나란히 설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철학적 의미에서 ‘희생’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버리고, 그로써 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야구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희생이 있다. 기록으로 남는 희생번트와 희생뜬공뿐만이 아니다. 지난 시즌 넥센이 썼던 ‘미끼 주루’도 한 종류다. 주자 만루에서 2루주자가 리드를 길게 하면서 투수의 견제구를 유도한 뒤 투수가 2루에 공을 던지는 순간 3루주자가 홈을 파고드는 식이다. 이때 2루주자는 자신의 아웃을 각오하고, 미끼가 되어주는 희생을 감수한다.
반드시 출루가 필요한 순간,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쪽 공을 피하지 않고 맞는 것도 희생이다. ‘패전처리 투수’도 의미 있는 희생이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다음날 열리는, 이길 수 있는 경기에서 다른 투수들이 던질 수 있도록 이닝을 책임진다. 야구에서 가끔 일어나는 보복 행위 또한 퇴장의 위험을 혼자 무릅쓰는 행동이다.
야구의 희생은 단순히 개인이 집단을 향해 순종하고 복종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희생이 득점과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가치 있고 의미를 지닌다는,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의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주자 1루 상황에서 자신의 타율 상승을 포기하고 번트를 대는 것은 다음 타자들이 안타를 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의미를 가진다. 주자 3루에서 이뤄지는 스퀴즈 번트 또한 3루주자와 타자 사이의 믿음이 없으면 성공 확률이 떨어진다. 패전처리 투수도 다른 투수들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충분한 휴식을 얻고 미래의 경기에서 호투해 승리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동반돼야 힘을 낼 수 있다.
상호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지시된 희생은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 다음 타자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희생번트는 단지 아웃카운트를 늘리는 데 그친다. 감독이 시켜서 하는 희생은 오히려 팀의 조직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다음 경기 동료들의 호투와 그 경기를 승리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는 패전처리 투수의 투구는 자칫 미래의 성장 가능성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고가 벌어졌다. 배를 책임져야 할 선장은 희생은커녕 일찌감치 배를 탈출했다. 구조작업은 우왕좌왕했고, 발표는 오락가락했다. 가족들의 목소리는 메아리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졌다. 감독은 호통만 치고, 코치들은 눈치만 본다. 이미 가슴에 못이 박힌 선수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야구였다면 백전백패다. 차라리 야구였다면…. 적어도 내일 또 경기가 열리니까. 아니, 이미 우리는, 모두, 졌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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