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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과 불문율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5. 5. 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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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서 벤치 클리어링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충돌하는 두 개념이 있다. 야구의 상호 존중을 뜻하는 ‘불문율’과 돈 내고 온 팬들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최선의 야구’다. 둘은 정말 상충하는 것일까.

영어로 코드(code)라고 말하는 불문율은 야구 규칙에 나와 있지 않지만 선수들이 서로를 위해 지키는 일종의 문화다. 이 코드를 어길 경우, 보복을 한다. 상대를 일부러 맞히는 위협구가 대표적이다.

불문율은 ‘서로 적당히 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타협이 아니다. 공정한 경쟁에 대한 ‘예의’와 ‘상호 존중’에 대한 규정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에도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다. 투항하는 포로를 해치지 않는 것,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승리를 위해 뭐든지 해도 좋다’는 게 ‘최선’이라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된다.


야구에서 불문율이 생긴 것은 그만큼 야구가 위험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작고 딱딱한 공을 시속 150㎞가 넘도록 힘껏 던지는 종목이다. 공격 측과 수비 측이 교차되는 지점은 좌우 폭 1m 이내의 베이스 라인이다. 야구공은 타석에 있는 타자에게 던질 때보다 공을 쳐다보지 않고 달리는 주자를 향할 때 훨씬 위험하다. 베이스 위에서의 충돌은 선수생명과 직결된다. 슬라이딩 때 다리를 들면 수비수들은 야구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야구 규칙으로 일일이 규정할 수 없는 각종 위험한 상황들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호 존중의 불문율이다. 상대가 위험한 플레이를 하면, 위험한 방식으로 응징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위험한 플레이를 하지 말 것.

종종 ‘도루’가 문제가 된다. 이미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이긴 팀이 시도하는 도루는 ‘코드’를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상대가 위협구로 응징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끝까지 한 점이라도 더 내려는 최선의 플레이가 뭐가 문제냐”고 주장한다. 물론 불문율상 도루 허용의 구체적인 이닝과 점수 차이를 규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도루는 위험하다. 2루 베이스 위에서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플레이다. 도루 시도는 단지 주자가 ‘아웃카운트 1개’라는 리스크만 안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송구를 받아야 하는 내야수의 부상 가능성을 감수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농구에서 승부가 기운 4쿼터 막판, 이기고 있는 팀이 상대 수비수가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무리한 돌파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문율이랍시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플레이를 펼치는 것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불문율에 대한 오해다. 불문율은 승부가 났을 때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소수점 셋째자리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야구 선수들이다. 점수 차이가 아무리 크게 났더라도 마운드의 투수가 대충 던질 리 없고, 타석의 타자가 아무렇게나 방망이를 휘두를 리 없다. 다만 승부가 기울었을 때 누군가 다칠 가능성이 생기는 도루를 가능하면 하지 말자는 것뿐이다. 넉넉히 이기고 있는 팀(그것도 원정팀)이 달아나는 홈런을 때리고 난 뒤 세리머니를 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다. 상대팀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상대팀 팬들을 향한 예의이기도 하다.

지난 23일 한화-KT전 5점차 9회초, 한화 김성근 감독이 도루를 성공시킨 강경학을 교체한 것은 ‘불문율’에 대한 존중이다. 잘못을 했기 때문에 뺐다. 경기가 끝난 뒤 KT 신명철의 상대 벤치를 향한 욕설은 불문율에 오히려 어긋난다. 다음 맞대결에서 ‘위협구’가 불문율에 부합한다. 물론 화끈한 방망이로 승리를 거두는 게 더 확실한 응답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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