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잠실 LG-삼성전을 앞두고 심판실을 찾았다. 삼성 이승엽이 개인통산 홈런 400개에 2개를 남겨두고 있었다. 한 경기 2홈런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12년 전, 이승엽이 한·미·일 최연소 300홈런과 한 시즌 최다인 56홈런을 기록하기 전에 ‘특별공’을 사용했다. 이승엽 타석 때 심판만 아는 표식을 한 공으로 홈런공의 위조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일종의 ‘홀로그램’ 역할이지만, 대기록이 나왔을 때 이를 심판이 ‘공인’해 준다는 의미가 더 컸다. 특별공 사용 여부를 물었다. “허허, 아직 2개나 남았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31일, 다시 심판실을 찾았다. 전날 이승엽은 399개째를 때렸고, 한 타석을 더 들어선 터였다. 특별공 사용 여부에 대해 “관계 구단인 삼성의 공식 요청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전날 399개를 치고 나서도 아무런 요청이 없더라”고 말을 이었다.
프로야구 역사상 다시 나오기 힘들 개인통산 400홈런이라는 기록에 대한 리그 참가자들의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태도다. 리그의 기록이 아니라, 삼성이라는 팀의 한 선수가 기록한 것 아니겠느냐는. 인터넷 은어를 빌리자면, ‘대기록? 아몰랑(난 모르겠다), 야구는 승부가 중요한 거 아냐’의 수준.
기록을 관리하고 기념해야 할 KBO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31일 잠실구장 오른쪽 외야석은 LG 응원석이었지만 삼성 유니폼 입은 팬들이 많았다. 좌타자 이승엽의 홈런존이었다. 12년 전, 이승엽이 가는 곳마다 넘쳐났던 ‘잠자리채’가 보일 법도 했는데,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날 팬들이 들고 온 잠자리채 30~40개가 ‘압수’를 당했다. 올시즌 KBO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구장 내 안전 캠페인, SAFE 규정 때문이다. 1m가 넘는 물건을 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다. ‘홈런 대기록’의 상징물이었던 잠자리채가 안전을 위협하는 도구가 됐다. 이날 잠자리채를 준비했다가 제지당한 김영종씨(46)는 “잠자리채도 일종의 볼거린데 왜 막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록에서 역사와 비유와 상징을 제거하면, ‘아몰랑’, 남는 것은 겨우 숫자뿐이다.
이날 9회초 2사 2루, 9-3으로 앞선 삼성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LG 포수 유강남은 바깥쪽에 빠져 앉았다. 투수 신승현은 누가 봐도 뻔한 볼 4개를 던졌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경기 전 “정상적인 승부를 하겠다”고 공언한 LG 벤치는 고의4구 지시 가능성을 적극 부인했다. 유지현 수비코치는 “극단적인 시프트를 사용했다. 시프트를 쓰고 거르라고 지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수함 투수에 3할8리로 강한 이승엽, 비어 있는 1루, 다음 타자 박해민의 잠수함 상대 9푼1리를 고려하면 ‘정상적인 야구’라고 볼 수도 있지만 1루쪽 강한 시프트 운영에 이은 바깥쪽 볼 4개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벤치의 작전과 실제 수행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홈런 관련 대기록 개연성을 제거하고라도 벤치와 플레이가 어긋나는 ‘아몰랑’ 야구가 짙게 풍긴다. LG가 과거 암흑기를 겪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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