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일단, 독일 철학자 칸트가 좋아할 만한 종목은 아니다. 야구 경기 도중 칸트가 말한 대로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야구는 ‘속임수’가 일상적인 종목이다. 벤치에서, 3루 코치가, 포수가 복잡한 수신호로 ‘사인’을 내는 것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 행위다. 투수는 다리를 들어올리는 타이밍을 조절하며 타자를 속인다. 변화구 역시 타자를 속이기 위한 공이다.
모든 스포츠에서 작동하는 목표란 해당 종목의 참가자들이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박혀 있는 장애물이나 비능률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장애물·비능률성을 극복하는 기술을 연마해 겨루는 것이 스포츠다. 중력이라는 장애물을 딛고 규칙 안에서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것을 겨루는 종목이 높이뛰기다.
기록 종목이 아닌 구기 종목에서는 상대팀이 장애물, 비능률성의 대상이 된다. 두 팀으로 갈려 겨루는 스포츠는 서로의 목적(득점)을 달성하기 위해 첫째 규칙을 어기지 않고, 둘째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전제 안에서 갖은 속임수를 쓴다. 야구의 변화구뿐만 아니라 드리블의 페이크 동작들도 해당 종목의 기능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속임수는 예측 불가능성을 기반으로 한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플레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스포츠의 재미를 이루는 근본 요소다. ‘뻔한 경기’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 상대의 예측을 방해하는 속임수는 오히려 장려되기도 한다.
다만 ‘속이기’의 허용 범위 내 기본 원칙이 있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장애물·비능률성’과 관련한 전략의 일부이지만, 심판을 속이는 것은, 게다가 자연스러운 플레이의 결과가 아니라 고의적인 속이기 동작이 이뤄지는 것은 스포츠의 요소라고 하기 어렵다.
마크 J 해밀턴 미국 애슐랜드대학 철학과 교수는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에서 이에 대해 ‘얻을 자격을 넘어서는 이득을 취하려고 꾀하는 까닭’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공정을 기하려는 중재자를 속이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조금도 정당화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SK 김광현은 지난 9일 대구 삼성전 0-0이던 4회말 2사 2루, 박석민의 내야 타구를 모두 잡지 못하는 과정에서 글러브에 공을 갖지 않은 채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서던 최형우를 태그했다. 최형우는 물론이고 삼성 벤치와 심판도 모두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아웃이 선언됐다. 결과적으로 심판을 속이는 일이 됐다. 공이 없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태그를 했기 때문에 최선의 플레이 뒤 나온 심판 판정에 대해 ‘모른 척하기’와 또 다르다.
고의와 본능, 의도와 무의식 사이의 경계에 놓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그 순간의 고백 여부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경기 후 구단의 움직임은 이해하기 어렵다.
감독은 “마음이 무겁다”고만 얘기했고, 구단 역시 ‘논란 확산’만 우려할 뿐 아무런 조치 없이 자연스러운 진화만 기대하고 있었다. 한 구단의 고위 관계자는 “선수 보호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누군가가 나섰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K는 ‘스포테인먼트’를 내건 구단이다. 김성근 감독 재임 시절 ‘승리 지상주의’를 거부하며 ‘막걸리 야구’를 언급했고, 결국 김 감독을 해고했다. 만약 SK가 김광현의 행동을 ‘팀 승리를 위한 최선의 행동’이라고 여긴다면, 그래서 정당하다고 믿고 자연스레 잊혀지기를 원한다면 SK의 스포테인먼트는 그때그때 달라지는 이율배반적인 구호에 그친다.
설상가상으로 김광현은 팔꿈치를 다쳤다. 이미지가 나빠진 가운데 경기력 하락도 우려된다. 때를 놓쳤고, 만회도 어렵다. 자칫 구단의 우왕좌왕과 무신경이 리그의 보물 투수 한 명을 망칠까 우려스럽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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