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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의 길… 그리고 정체성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5. 8. 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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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널리 인용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첫 부분이다. 투수에게 중요한 것 역시 ‘길’일지도 모른다.

피츠버그의 투수 코치 레이 시어리지는 ‘마법의 손’으로 통한다. 2011시즌부터 피츠버그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10시즌 5.35였던 팀 방어율을 2011시즌 4.40, 2012시즌 4.16으로 끌어내렸고, 2013시즌에는 3.56을 기록하며 피츠버그가 2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뉴욕 양키스에서 3시즌 동안 방어율 4.79를 기록하며 하락세를 보였던 투수 AJ 버넷은 35세였던 2013시즌 피츠버그에서 시어리지 코치를 만난 뒤 방어율 3.30의 투수가 됐다. 부상과 부진으로 이제 다들 끝났다고 여겼던 프랜시스코 리리아노는 2013시즌 시어리지 코치를 만나 16승8패, 방어율 3.02의 투수가 됐다.

현역 시절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다. 좌완 불펜 투수로 여러 팀을 전전했다. 7시즌, 11승13패, 3.50. 새로 가는 팀마다 투구폼 수정을 요구받았고 그때마다 새로 제구를 가다듬어야 했다. 자신의 실패를 통해 얻은 경험. 시어리지는 코치가 된 뒤 2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투수에게는 각자 다른 스윙의 길이 있다. 둘째,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속, 구위, 제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Identity)이다.

피츠버그 투수 찰리 모튼은 데뷔 3번째 시즌이었던 2010년 2승12패, 7.57을 기록했다. 모튼은 다른 투수들처럼 ‘보다 높은 데서 던질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속구의 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리꽂는 속구’는 물론, 타자들에게 까다로울 수 있다. 그러나 시어리지 코치는 모튼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이를 ‘낮지만 보다 편안한 동작’으로 바꾸도록 권했다. 모튼은 자신이 갖고 있던 스윙의 길을 찾았다.

모튼의 정체성은 ‘투심 패스트볼’에서 나왔다. 모튼은 삼진을 잡는 투수가 아니었다. 땅볼이 주무기였다. 투심 패스트볼과 땅볼은 모튼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다. 모튼은 2011시즌 10승10패, 3.83의 투수로 변신했다.

넥센 투수 문성현이 시어리지 코치의 말대로 자신의 길,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성현은 지난 5일 KIA전에서 5이닝 2실점, 15일 롯데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변화가 있었다. 손혁 코치의 조언대로 투구 동작을 낮췄다. 문성현은 “키가 작다는 생각에 어릴 때부터 위에서 던지려고만 했다. 그 바람에 왼쪽 옆구리에도 무리가 갔다”면서 “지금은 마치 사이드암스로로 던지는 느낌으로 가고 있다. 이게 내 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체성’도 만들어가는 중이다. 문성현은 “이제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정확하게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야구공 실밥의 좁은 부분에 손가락을 모아 붙여 던지는 ‘무심 패스트볼’을 던지기 시작했다. ‘투심 패스트볼’의 변형이다. 15일 등판에서 땅볼아웃 6개를 잡아냈다. 외야 뜬공 아웃은 3개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고, 그 길 안에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 비단 야구의 일만은 아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끝없이 물어야 할 질문. 나는 누구, 지금 여기는 어디.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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